킬러들의 수다 - 유쾌한 소동극 이면에 감춰진 소시민의 지질한 생존 방식과 고독한 연대

킬러들의 수다 - 유쾌한 소동극 이면에 감춰진 소시민의 지질한 생존 방식과 고독한 연대
킬러들의 수다 - 유쾌한 소동극 이면에 감춰진 소시민의 지질한 생존 방식과 고독한 연대

사회가 규정한 합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타인의 생명을 앗아가는 기묘한 업을 생업으로 삼은 이들의 일상이 평범한 소시민의 고단한 궤적과 닮아 있다는 발견은 묘한 처연함을 동반한다. 냉혹한 암살자의 세계를 허무맹랑한 환상 대신 엉뚱하고도 지질한 인간 본연의 민낯으로 채워 넣는 이 이야기는 거칠고 비정한 도심 속 외로운 영혼들의 연대를 덤덤하게 포착한다. 낡은 은신처의 거실에 모여 앉아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하며 조잘거리는 남녀 혹은 사내들의 모습은 상영관의 불이 켜진 후에도 쉽게 가시지 않는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 개봉일: 2001년 10월 12일
  • 장르: 코미디, 액션, 범죄
  • 감독: 장진
  • 주요 출연진: 신현준(상연 역), 정재영(재욱 역), 신하균(정우 역), 원빈(하연 역), 정진영(조 검사 역)

킬러라는 기묘한 직업을 가진 사내들의 서글픈 일상

의뢰인의 기상천외한 요구에 맞춰 정밀하게 살인을 대행해 주는 4인조 전문 조원인 상연(신현준)과 재욱(정재영), 정우(신하균), 하연(원빈)의 하루는 피비린내 나는 폭력 대신 영혼을 탈탈 털리며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일상적인 소동으로 시작된다. 거대한 냉혈한의 마스크 대신 컴퓨터 모니터와 장부 사이에서 닳아 가는 20대 청춘의 에너지를 품은 이들의 은신처는 사회 시스템의 이면에 숨겨진 패자들의 도피처이자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팀의 리더로서 늘 실적 압박과 의뢰인들의 무리한 밀당에 시달리는 상연의 유약한 눈빛은 현실의 벽 앞에 무력감을 느끼는 소시민의 초상과 겹쳐 보여 묘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사격의 달인이지만 유순한 심성을 지닌 재욱과 폭탄 제조에 탁월하지만 감정 조절에 서툰 정우, 막내로서 형들의 잔심부름을 도맡는 하연이 뿜어내는 엉뚱한 열망은 차가운 시멘트 건물 뒤편에서 유유히 온기를 뿜어낸다.

이러한 기와장의 조합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들의 행위를 무조건 비난하기보다 이들이 왜 이토록 철저하게 세상의 그늘진 방관자로 살아가게 되었는지 그 이면을 추적하게 만드는 기묘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아나운서 오영란(고은미)의 뉴스 진행 모습에 넋을 잃고 그녀의 은밀한 의뢰를 넙죽 받아 들고 벌이는 이 소동극은 연애의 달콤함이나 권력 투쟁 대신 소통의 불통을 겪는 소시민들의 나약함을 여실히 증명한다. 킬러로서의 격렬한 밤이 지나면 다시 평범한 양복을 챙겨 입고 만원 버스에 몸을 실어야 할 것 같은 이들의 고단한 피로감은 관계의 단절 속에서 진정한 상대를 갈구하는 슬픈 정서를 한층 더 배가시킨다. 각본대로 흘러가지 않는 거친 임무 속에서 피와 땀방울로 범벅이 된 채 울부짖는 남자의 얼굴은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한 인간의 엄숙한 생존 전략으로 읽힌다.


집요한 추격자 조 검사와의 피할 수 없는 심리전과 파선

이야기가 심층부로 향할수록 킬러들의 꼬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조 검사(정진영)의 등장은 남녀 관계의 통속적인 치정이나 단순한 권선징악의 구도를 넘어선 인간 존재론적 비장미를 뿜어내며 파국을 향해 급격히 선회한다. 의리와 신뢰라는 소박한 가치가 법과 제도라는 거대한 조직 구조 앞에 파편화되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은 화면 가득 처연한 슬픔을 전달하며 관객의 마음을 차갑게 식힌다. 조 검사는 정의를 수호한다는 명분 하에 냉정하게 발걸음을 옮기지만, 킬러들의 인간적인 면모와 마주하며 내면의 지독한 충돌과 배신감을 맛보고 소통의 불가능성을 실감한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져 가는 구조 속에서 법 집행자와 범죄자라는 경계선 위를 위태롭게 외줄 타기 하는 이들의 신경전은 화면 특유의 질감과 맞물려 기이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이라는 화려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대담한 암살 작전과 빗속을 뚫고 달리는 자동차 차창 너머의 질주는 이 이야기가 지닌 리얼리티를 한층 견고하게 다진다. 상연 일당은 온갖 비열하고 치졸한 반칙을 동원하는 세상의 요구에 맞서 자신들만의 룰을 지키려 발버둥 치는데, 이들의 분투는 링 밖의 세상이 던지는 씁쓸한 현실 앞에 허무하게 부서져 내리는 모래성과 닮아 있다. 타인의 아픔에 침묵하지 않고 자신을 고용한 의뢰인들의 슬픔을 대신 해결해주려 했던 아이들의 무모한 헌신은 파멸을 자초한 인간이 거친 세상을 향해 내지르는 처절한 독백으로 완성되어 묵직한 힘을 발휘한다. 변화한 것은 이들을 둘러싼 비정한 환경이 아니라 가혹한 통과의례를 거치며 단단해진 내면의 시선이다.


회색빛 콘크리트 미로 속에서 나만의 온기를 돌아보는 사유

나에게 이 영화는 멈추지 않는 바퀴처럼 돌아가는 팍팍한 경쟁 사회 속에서 내가 방관해왔던 타인들의 슬픔과 나만의 순수함을 반추하게 만드는 서글픈 거울이다. 우리는 날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많은 타인과 밀착해 살아가면서도 정작 그들의 소외감이나 외로운 비명에는 귀를 닫은 채 나만의 안락한 방을 사수하는 데 급급하다. 경쟁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작은 도덕성을 조금씩 타협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이면이 오직 자신들만의 신념을 위해 권총을 쥐었던 젊은 영혼들의 지질한 분투 앞에 철저하게 해체된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오만을 버리고 그들의 슬픔에 온전히 침잠할 때 비로소 마주하는 낯선 인간성의 가치는 팍팍한 삶을 버텨내야 할 조용한 원동력으로 자리 잡는다.

모든 소동이 가라앉고 잿더미 같은 현실의 길목에 홀로 서게 되는 생존자의 공허한 얼굴은 성취 뒤에 찾아오는 지독한 허무함과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외로움을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아무리 애써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세상의 장벽은 소통의 영원한 한계를 증명하는 한편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소중한 존재들을 바라보는 눈빛을 단단하게 만든다. 비극적인 운명의 소용돌이를 거쳐 마침내 도달한 조용한 각성의 서사는 차가운 현실의 포화 속에서도 자신만의 맑은 영혼 하나쯤은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야 함을 절감케 하는 참으로 고마운 서사다. 영혼의 눈을 가린 채 콘크리트 미로 속을 헤매기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 주변의 작은 존재들이 보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신현준, 신하균, 원빈, 정재영 등 지금은 보기 힘든 초호화 캐스팅만으로도 화제를 모으는 이 작품은, 장진 감독 특유의 독특한 블랙 코미디와 엉뚱한 웃음 코드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수작입니다. 다소 촌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연출조차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호흡으로 충분히 상쇄하며, 쓸데없이 진지해서 더 웃긴 상황들은 관객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시간이 흘러 다시 보아도 여전히 흥미로운 소재와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향연을 통해, 한국 코미디 영화의 한 시절을 상징하는 대표작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삼류 무대 같은 거친 현실 위에서 소시민 킬러들이 조잘대며 나누던 수다는 각박한 세상을 버텨내기 위한 외로운 영혼들의 서글픈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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