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추억 - 미치도록 잡고 싶었던 그날의 기억과 미완이 주는 먹먹한 잔상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떤 기억은 바람에 씻겨 가지만, 역사의 비극과 개인의 집착이 얽힌 순간은 쉽게 휘발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미제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던 영구적인 상처는 스크린 위에서 한 시대의 공기를 복원하며 관객의 가슴에 굳은살을 박아 넣는다. 이 기록은 단순히 범인을 쫓는 맹목적인 추적극이 아니라, 시대를 지배했던 거대한 무력감과 마주하는 처연한 여정이다.

출처 : 네이버


시대의 공기를 품은 시골 형사들의 우당탕거리는 발걸음

논두렁 한가운데에서 발견된 시체는 평화롭던 시골 마을을 단숨에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필자에게 다가온 이 영화의 첫인상은 매우 기묘한데, 살인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초반부의 화면은 기이할 정도로 토속적이고 일상적인 풍경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육감과 직관만을 믿고 용의자의 눈빛만을 쫓는 시골 형사 박두만은 당시 과학수사라는 개념이 전무했던 시절의 뒤처진 초상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용의자의 발자국이 찍힌 논두렁을 군용 트랙터가 무자비하게 뭉개고 지나가는 장면이나, 동네 바보를 앉혀놓고 억지 자백을 받아내려는 형사들의 수사 방식은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이와 달리 서울에서 내려온 엘리트 형사 서태윤은 서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사건의 맥락을 짚어 나가기 시작한다.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두 남자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부딪히는 과정은 단순한 갈등을 넘어 당시 한국 사회가 직면했던 야만과 문명의 충돌처럼 읽힌다. 피해자가 늘어갈수록 축축한 비가 내리는 시골 마을의 분위기는 보는 이의 숨통을 조여오고, 엉성했던 형사들의 눈빛에도 점차 광기와 집착이 서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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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붕괴와 어둠 속에 갇힌 진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붉은 옷의 여인이라는 기괴한 법칙은 이들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범인을 잡겠다는 집념 하나로 버텨온 서태윤은 수사가 미궁에 빠질수록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박두만의 야만적인 방식으로 닮아간다. 이성에 기반을 두었던 서울 형사가 절망과 분노에 휩싸여 용의자에게 총구를 겨누는 후반부의 터널 장면은 인간이 거대한 악 앞에서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를 처절하게 증명한다. 유일한 단서였던 미국의 유전자 분석 결과마저 불일치로 나왔을 때, 어두운 기차 터널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용의자의 뒷모습은 진실이 영원히 암흑 속으로 사라졌음을 암시한다. 필자는 이 장면에서 범인을 놓쳤다는 사실보다, 시대를 집어삼킨 거대한 무력감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한계를 목도하며 깊은 씁쓸함을 느꼈다. 과학도, 집념도, 심지어 인간의 이성마저도 그 시절의 어둠을 밝히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내리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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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자들의 시선과 영원히 끝나지 않을 추적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찾아온 사건 현장의 논두렁은 과거의 참혹함은 지워진 채 평화로운 햇살만이 가득하다. 형사를 그만두고 평범한 직장인이 된 박두만이 우연히 배수로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한 아이가 얼마 전에도 어떤 아저씨가 이 구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말을 건넨다. 그 아저씨의 얼굴이 어땠냐는 질문에 아이가 던진 평범하다는 대답은 관객의 심장을 그대로 멎게 만든다. 박두만이 스크린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영화가 끝나는 순간, 그 서늘한 시선은 영화 속 범인뿐만 아니라 극장 문을 나서는 우리 모두를 향해 영원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 곁에 숨어 숨 쉬고 있을 평범한 악의 얼굴을 끝까지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미완으로 남았던 비극을 기억 속에 박제하는 위대한 마침표다. 극장에 보았을때 긴장하면서 봤던 영화, 옛날의 현재 주인공들의 젊은 모습을 보는 재미도 있다.



비극을 마주하는 가장 품격 있는 자세는 분노가 아니라, 그날의 공기와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끝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는 연대의 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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